글. 오광수(미술평론가)
금동원의 근작에 대해 금동원은 자연과 꽃을 그리는 화가다. 아니 금동원은 자연과 꽃으로 표상되는 색채를 그리는 화가다. 그에게 있어 자연과 색채는 동의어다. 꽃을 그리기 위해서 색채를 동원하는 것인지 색채를 구현하기 위해 꽃을 대상화하는지 얼른 구분이 안 된다. 상식적으로 꽃을 그리기 위해 색채가 동원될 터이지만 그에게 있어 꽃은 곧 색채니까 색채를 통해 꽃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셈이다.
꽃은 구체적인 사물 즉 대상이지만 색채는 추상적인 수단이다. 추상적인 수단이 구체적인 물상을 통해 비로소 존재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놀라운 비밀 속에 그의 창조의 계기가 숨어 있다.
금동원이 그리는 나무와 꽃은 단순한 의미의 나무와 꽃이 아니라 나무와 꽃으로 대변되는 아름다움의 실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린다. 그가 그리는 꽃의 모양이 특정한 이름을 가진 것이라 할지라도 개별로서의 꽃이라기보다는 꽃 일반 즉 아름다움으로 표상되는 자연 전체를 이름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에 그가 염원하는 아름다움의 시원히 펼쳐진다.
그의 근작은 두 개의 시리즈로 나누인다. <사유의 숲>과 <아름다움의 시원>이 그것이다.
이 커다란 주제하에 개개의 작은 내용의 명제가 첨가된다.
예컨대, <사유의 숲-나무, 길>, <사유의 숲-꽃과 시>, <아름다움의 시원-꽃 이야기>, <아름다움의 시원-붉은 산과 푸른 나무>하는 식이다. 명제에서도 확인되듯이 온통 숲, 나무, 꽃, 산 등으로 채워지고 있다. 화면은 개별이지만 내용은 전체를 지향한다. 그가 지금까지 그려온 작품 전체가 하나의 연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작의 두 개의 시리즈 역시 두 개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동시에 두 개가 된다. 자기 세계에 대한 집착 아니 자기 주제에 대한 일관된 관심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에서뿐 아니라 자신의 생활까지도 이 같은 관심의 일관성 속으로 끌어들인다. 양평에 있는 그의 작업실엔 <아름다움의 시원>이란 팻말이 부착되어 있다. 예술은 생활에서 오고 생활은 예술을 풍성하게 가꾼다. 예술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융화하는 세계, 아마도 그가 지향하는 세계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작업실을 에워싼 자연은 가히 아름다움의 시원에 비길 만하다. 원생적인 건강한 향취와 색채로 뒤덮여 있다. 동화 속의 그림처럼 모든 사물이 이야기의 씨앗이 된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대상은 존재로서의 자신만을 내세우지 않는다. 더불어 있음으로써 비로소 존재감을 지닌다.
나와 네가 하나로 혼융되는 범신의 세계야말로 그가 지향하는 세계다. 그것은 원생의 삶이요 시원의 아름다움이다. 나무 속에 집이 있고 하늘로 떠가는 물고기가 있는가 하면 오색의 구름이 하늘의 가장자리에 걸린다. 꽃처럼 피어나는 무지개와 아직도 뿌려지는 빗방울이 점점이 수를 놓는다. 색색의 편지는 어딘가로 떠가고 있다. 화사한 색채로 뒤덮인 대지와 뭇 생명이 뿜어내는 삶의 환희가 장막처럼 대지 위로 떠간다.
금동원의 작품은 아이들이 그리는 동화 풍의 그림이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순후한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다. 맑고 투명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열린 세계이다. 그러기에 색채는 건강하고 발랄하다. 강렬한 대비의 원색이 자아내는 환희가 아름다움의 시원을 노래 부른다.